불가에서는 등을 밝히는 것을 연등(燃燈)이라고 한다.

등(燈)에는 " 부처님의 가르침 "이라는 의미가 담겨있어 예로부터, 등을 공양하면 광대무변한 공덕을 얻는다고 하였다.

[현우경]에 전해지는 "난다'라는 여인의 등공양에 대한 설화는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이다.

가난한 여인인 난다가 중생구제의 대원을 품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팔아 부처님전에 밝힌 소박한 등잔불은 부자들의 호화로운 등보다 더 밝게 더 오래 빛났다고 한다. "
그리고 [지등공덕경]에도 불법승을 믿어 약간의 등을 바치어도 그것으로 받는 복덕은 무궁무진하고, 불멸 후에 등을 탑사에 밝히면 현세에 있어서는 삼종의 청정한 마음을 얻을 것이오, 내세에는 삼십삼천에 태어날 것"이라고 설해진다.

불전에는 이외에도 연등 방법, 등유의 종류 등에 관한 설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등의 수효나 장치가 불가의 관례에 의하여 일정 정도 규정된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많이 사용되는 등으로는, 연잎을 하나하나 붙여서 만드는 연화등이나, 그마저 여유가 없으면, 쉽게 구입할 수 있는 비닐로 만든 주름등 정도이다.
또, 등 공양을 하는 시기도 사월 초파일에 머물러 있는 형편으로, 서원하는 바를 마음속에 새기며 자신이 손수 만들어 밝히던 등공양의 의미가 많이 퇴색되어 버렸다.

우리나라에 불교행사가 나라의 행사로서 거행된 것은 서기 372년 고구려의 소수림왕 재위시에 진(前秦) 나라 왕 부견이 보낸 순도에게 불상과 경문을 받은 것으로, 이를 시작으로 삼국에 불교가 전래되었다. 그러나,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 불교와 불교 문화가 전래되어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 밖에 없었으므로, 중국에서의 등 문화를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불교는 기원전 2~3년경(前漢末)에 중국에 전래되었다. 그리고, 이후(後漢末)에 절에서 연등공양이 행해졌다고 한다.

사료에 의하면 정월 초하루, 엿새, 팔일, 보름.. 등으로 등 공양을 올린 날짜가 일정하지 않았다. 이것이 점점 연중행사의 하나로 변해오다가 당나라에 와서는 국가의 행사로 제정되고, 시기는 정월 상원 및 그 전후 2일에 걸쳐 거행되었다.

이 시기(특히, 唐) 연등행사의 모습은 종교적인 장엄함 보다는 호화로운 축제의 모습을 띄게 되었으며, 그 의미 역시 공양물이 아닌 장식물로 변하게 되었다. 즉, 불가에서는 연중행사가 아니었던 것이 것이 중국에 와서 변질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연등행사를 이르던 명칭도 이에 따라 상원연등(上元燃燈), 상원관등(上元觀燈), 상원야유(上元夜遊) 등으로 중국적 취미와 기호에 맞게 변화하였다.

宋代에 들어서는 唐代의 화려한 연등행사가 쇠퇴하고, 주로 연회의 장식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나라에 지변이나 국상이 있는 등 어려움이 있을 경우에는 상원연등 행사를 하지않고 근신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반드시 해마다 치뤄야 하는 행사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는 연등을 '하는' 것에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에 의의가 있었으며, 선근의 하나로서가 아닌 장식의 하나였다.

이 시기 상원연등의 화려한 행사는 도시 중심이었으며, 중국 각지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송나라 때부터 도시에서 지방으로 점차 보급됨에 따라 유희적이고 오락적인 기분은 줄어들고, 그 지방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민간 신앙과 결부되어, 주술이나 신에 대한 제사와 같은 것으로 변화되었다.
그리하여, 각 지방마다 조상이나 토지신, 귀신에 제사에 사용되고, 뱀이나 독충들에 의해 폐해가 많은 지방에서는
蛇蟲, 모기 등을 방제하는 의미로, 전염병이 흔한 지방에서는 百病을 방제하는 뜻에서,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지방에서는 基地를 방제하는 주술의 하나로써 각 지방마다 독특한 모양과 크기의 등이 만들어지고 연등행사가 이루어졌다.
도시에서도 이런 요소가 있어, 연등은 복을 비는 제사와 같은 것으로 생각되었으며, 당나라를 거치면서 희미해졌던 종교적 생명이 부활하게 되었다. 중국인이 연등을 수용하는 데는 이러한 일면이 있었다.

불이 주술에 사용되는 것은 세계 어디서나 일반적인 예로써, 불가의 연등도 유원한 옛날에 그 기원을 가진 일종의 주술이었던 것이 불가에 흡수되어 불교 의례와 하나가 된 것이며, 중국인이 전부터 전해온 불이나 등화의 풍습을 연등과 혼동하여 그것을 주술적 제례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당연한 면이 있다.
당나라 이전까지는 대체로 불교적 색채가 짙었으나, 당대를 지나면서 불교성이 약해지고, 종래의 연중행사와 혼동되며 장식적인 성격이 강해지다가, 지방으로 점차 확산되는 과정에서 민간신앙과 결부되어 종교성을 회복하고 다양한 형태의 등문화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연등은 이미 중국에서의 변이를 거친 연중행사적인 성격의 연등이 불교와 함께 도입됨으로써, 그대로 고정되었다.

우리나라는 불교 전래 이전에 부족신이나 천신, 조상신, 태양 등을 숭배하였으며, 신앙과 생활이 밀접하게 관계하여 '제천대회'와 같은 종교 행사를 통하여 사회 안정을 영위하려는 측면이 강했기 때문에, 불교 수용에 있어서 그 사상체계보다는 외향적 의례의 수용을 통한 만족을 우선시 하였다.

기록으로 남아있는 우리의 가장 오랜 연등행사는 신라의 진흥왕 때이다.

호국불교의 성격이 강했던 이 시기에는 전사한 병사들의 영혼을 달래는 백고좌회를 통해 정월 보름에 황룡사에서 성대히 치러졌다고 한다.
신라는 국가적 대소사를 불교적 영험력에 의지하는 한편, 실천 규범으로써의 세속오계(사회)와 팔관제회(교단)를 전개하였다.
신라의 연등행사는 농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풍우신에 대한 용등제와 그 밖의 민족적 행사 등이 불교의 등공양과 습합된 형태인 종합적 가무제로 주로 호국 신앙의 본산인 황룡사에서 거행되었다.
이후, 삼국이 신라에 의해 통일이 되고, 고려 시대에 불교가 번창하면서 우리나라의 연등행사도 정례화되었다.

고려 시대에 들어와서는 국가적 제전이 봄의 연등회와 가을의 팔관회로 정착이 되었다.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시대에는 연등회와 팔관회를 주관하는 관청(연등도감)까지 따로 두었다. 고려 시대에는 연등행사의 종교적 성격이 강해서 다양한 사회적 재난을 방지하고, 왕궁의 후사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도 행해졌으며, 전래의 제천의식과 농경의례를 불교적으로 전개하는 데도 일조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정월 보름이나 이월 보름에 대부분 연등회를 열었지만, 그 밖에도 불사의 건립, 신조된 불상을 경찬 할 때도 등공양을 하였다. 그러던 것을 고려 중엽에 최이가 사월 초파일로 연등회를 옮겨 갔다고 [고려사]에 전한다.
연등회의 절차는 첫날은 소회일로서 태조전(왕건사당)에 참배하고, 다음날은 대회일로서 왕의 참석하에 왕에 대한 의례와 축제가 이어졌다.

팔관회도 연등회와 같이 전통 습속이 불교 의례화한 것이다.
그래서 고려의 팔관회는 불교 격식 그대로의 팔관회는 아니고, 여러 토속신에 대한 제사도 아울러 행해진 종교행사이며 종합문화제였다. 연등회나 팔관회가 열릴 때에는 노래하거나 춤추기 위한 대규모 야외 무대를 설치했으며, 이 무대를 중심으로 주변에 수 많은 등을 매달아서 밝혔다.
이 당시 고려의 연등은, 그 시기 다른 불교 미술의 발전 정도와 견주었을 때 단지 공양물 수준의 것이 아니라, 화려하고 아름다운 장엄물로서의 등이 경쟁적으로 제작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유교를 정치 이념으로 내세웠던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불교적 색채는 옅어지고 민간신앙과 습합되는 형태로 사월 초파일의 연등행사가 명맥을 이어왔다.
조선 초기 학자들은 연등을 불교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한나라에서 기원하는 태일성 숭배로 보았기 때문에, 연등에 대한 강력한 폐지론에도 불구하고 존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연등문화가 이미 전통으로 뿌리를 깊게 내렸다는 데서 의미를 찾을 수가 있다.
조선 시대의 등불놀이는 지금처럼 사월 초파일 날 행해졌으나, 점차 민간 놀이화 되면서, 초여름이나 겨울철에도 즐기게 되었다. 이 시기가 농민들이 힘든 농사 일을 한고비 넘기고 숨돌릴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로 관 주도의 연등행사는 거의 자취를 감추고 민간에 의한 민속으로써의 연등제가 행해졌으며, 연등놀이가 행해지는 공간도 대도시에서 상업중심지로 옮겨가는 과정을 겪게 된다. 이는 등제작에 필요한 재원을 누가 대는냐에 따른 시대상의 반영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연등행사의 유래에 관해 중국과 우리나라의 등 문화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등문화는 특히 아시아에서 발달 되었는데 불교권의 국가들이 대표적이다. 특히, 중국이나 일본의 등문화가 발달해있다. 중국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정월이 되면 요란하다 싶을 정도의 폭죽과 화려한 등놀이를 즐기며 새해를 맞이하고 있다. 그에 비해 일본은 공동체적인 성격의 등놀이를 즐긴다. 등을 준비하고 즐기는 과정이 모두 공동체적 질서로 통제된다.
등이 민족 문화 속에 자리 잡은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우리나라는 조선왕조를 거치면서 등 문화가 왜소화 되고, 일제 시대를 겪으면서 그 명맥조차 흐려졌다.
그리하여, 현재는 사월 초파일의 연등행렬이라는 불교만의 축제로 축소되어 버린 듯하다. 19 세기 중엽의 사월 초파일 광경을 묘사한 [동국세시기], [열양세시기] 등의 자료에 나타난 모습과, 일부지방에서 근래까지 행해지던 몇몇 등 놀이를 참고하여 예전의 다양한 등 놀이 문화의 자취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