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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를 찾아온 유마거사

연꽃 0 6,391 2008.10.18 00:00
아래 내용은 제가 자주 가는 다음카페---
유마와 수자타의 대화(http://cafe.daum.net/yumawasuzata)라는 카페에서 옮긴 내용입니다.
 
여기 게시판에서 읽기엔 내용이 좀 많긴 하지만 강추하고 싶기에 올립니다.

카페 들어가셔서 글도 읽어보시고 책도 읽어보시면 공부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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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를 찾아온 유마거사

-「유마와 수자타의 대화」시리즈에 붙여

 

*이 글은 저의 독후감입니다. 누구나 읽고 옮기셔도 좋습니다. 알타이하우스 드림.





「유마와 수자타의 대화(1권)」

위없이 깊은 미묘법이여(無上甚深微妙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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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와 수자타의 대화(2권)」

백천만겁인들 어찌 만나리(百千萬劫難遭遇)

- 붓다와의 만남

「유마와 수자타의 대화(3권)」

내 이제 보고듣고 받아지니니(我今聞見得受持)

- 유마의 한 생각

「유마와 수자타의 대화(4권)」

부처님의 진실한 뜻 알아지이다(願解如來眞實意)

- 유마의 일기

(글 김일수, 도서출판 도피안사, 2008)


차례

1. 아무도 몰랐다. 비야리성의 유마거사가 다녀갔다는 사실을…

2. 페니실린 쇼크

3. 하나님을 불교에서 찾다

4. 일수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도중에 부처를 믿다가 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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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무도 몰랐다. 비야리성의 유마거사가 다녀갔다는 사실을….


유마가 다녀갔다. 몰랐다. 아무도 몰랐다. 산마루를 넘어갈 때 살짝 이마를 스친 바람 한 점, 새벽길에 옷깃을 적신 이슬 한 방울, 어쩌면 저물어가는 봄날에 가까스로 들어본 소쩍새 울음소리 같았는지도 모른다.

그가 이 시대를 찾아와 같은 뉴스를 들으며 같은 고민을 안고 이웃에 살았다는 사실을 주변에서는 알지 못했고,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도 직장을 다니고, 사업을 하고, 외환위기를 겪고, 우리가 보던 드라마와 영화를 보고, 월드컵이 열릴 때는 그도 ‘붉은 악마’가 되었다. 벗도 사귀고, 사람들을 사랑하기도 했다. 우리들이 대개 그러하듯 그에게도 사랑하는 아내가 있으며 귀여운 아이들이 있다.

예수도 부처도 오직 사람들 속에 있었듯이 그 역시 우리 속에 있었다.

그는 스스로 유마라고 밝혔다. 굳이 숨기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를 유마로 알아보지 못했다.

유마가 언제 적 사람인데? 그는 죽었어. 그냥 인터넷 아이디일 뿐이야.

이런 이치로 우리 주변에 늘 있는 관세음보살, 문수보살을 보지 못하고, 우리 이웃으로 살아가는 보살들을 보지 못하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인들을 섬기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도 자연스럽고 천연덕스러워 별로 특별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가 인터넷에 올린 ‘도인들의 이야기’란 글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어쩌면 자신을 소개하는 자신의 면모이리라.


- 도인이 도인과 만나 도를 이야기할 때

오랜만에 만나면 “오랜만이군. 잘 있었는가?”

아플 때 만나면 “몸은 어떤가? 견딜만한가?”

점심 때 만나면 “점심은 먹었는가?”

비즈니스하다가 만나면 “돈벌이는 잘 되어 가는가?”

그리고 시간이 되어 헤어질 때는 “잘 가게. 또 보세”하고 만다.


그렇다. 이처럼 그 역시 그러했다. 함께 노래방에 가 ‘소양강 처녀’나 ‘남행열차’를 부르고, 술집에 가 ‘참이슬’이나 ‘처음처럼’ 같은 낯익은 소주를 나눠 마셨다. 돈을 구하기 위해 뛰어다니기도 하고, 자식이 아플 때는 병원으로 달려가 안달하기도 했다. 그냥 이웃집 아저씨, 잘 아는 선후배, 내 곁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 군중 속의 한 사람, 다만 그러했다. 그래서들 몰랐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번 더 귀띔을 해주었었다.


-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실 때에는 항상 보살의 모습으로 오시고, 보살의 모습으로 오신 뒤에는 항상 부처됨(成佛)을 보이십니다.

아, 물론 보통 사람의 모습으로도 오십니다. 백정이나 음란한 여인이나 무지렁이나 바람둥이나 거렁뱅이 같은 모습으로 오실 때에는 항상 눈물콧물 범벅이 되게 몸을 떨며 엎어져 우는 중생의 모습입니다. 다른 아무 것도 못하고 오로지 간절히 간절히 염불하는 모습만 겨우 보여줍니다. 그러고는 쓸쓸히 추운 겨울 찬 바닥에 거적대기를 깔고 죽어버리면 호적에는 무연고자가 동사(凍死)한 것으로 빨간 두 줄이 그어집니다. 아무런 상서로움도 없이, 아무런 방광도 없이….

그래서인지 당신이 그를 몰라볼 뿐입니다. 당신에게 염불을 가르치려 당신 곁에 그런 모습으로 태어나는 운명을 감수하고 계시다는 것을 당신은 까맣게 모릅니다. 아, 무정한 사람!


이 글을 보면 전율이 인다. 그가 그렇게 간절히 말했는데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의 말은 단지 유마 자신을 두고 한 말만은 아니다. 지금 이 시각에도 우리 주변에 수많은 보살들이 있으되 우리가 보지 못하는 일이 더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성인이 이 세상을 다녀가실 때에는 늘 그러했다. 위대한 예술가가 세상을 다녀갈 때도 그러했다. 영광은 후세의 몫이지 당신들은 그 어떤 영광의 불빛도 받지 않는다. 도서관 사서일이나 하다 사라진 노자, 평생 변변한 명예를 얻지 못한 공자, 자살한 고흐,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정신병으로 죽은 이중섭…. 그들을 알아본 건 고사하고 비방이나 일삼았다.


여기 이 시대를 찾아온 예수와 같은 분, 비야리성의 유마거사와 같은 분, 유마 김일수를 보라. 비록 때늦은 자각이긴 하나 지금이라도 그에 대해 알아야만 한다.

그의 이름은 김일수, 1954년 2월 24일 제주 중문에서 태어나, 육이오전쟁 이후 3남6녀가 자라는 대가족에서 이승의 삶을 열었다. 그리 먼 얘기가 아니잖는가. 우리들 자신이거나 형이거나 동생이거나 혹은 아버지 시대가 아닌가.


그는 왜 하필 4대째 개신교를 믿는 집안에 몸을 나투었을까. 그의 아버지는 스물다섯 살부터 장로를 지내고, 목사를 지내고, 어머니는 시골 병원집에서 자란 독실한 개신교 집사였다. 친가와 외가가 모두 개신교를 신앙했으며, 외삼촌이 목사이며, 누나들은 목사의 부인이 되기도 했다.

그가 태어날 때부터 가정예배가 일상으로 이루어졌고, 교회에서 잔뼈가 굵을 만큼 크리스마스, 부활절, 추수감사절, 예배, 기도가 생활이었다.


이런 가풍에 힘입어 그는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교회에 다니며 성경을 배우고 익히고 외우고 찬송하며 기도하는 생활에 깊이 젖어들었다. 그래서 하나님과 예수님이 세상을 지배하고, 나라를 지배하고, 사회를 지배한다고 굳게 믿으며 자랐다. 풀 한 포기 자라는 것도, 열매 한 알 열리는 것도, 비 한 방울 떨어지는 것도 다 하나님의 섭리요, 하나님의 허락없인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믿었다. 이런 개신교 집안의 열망에 부응하기 위해 그의 첫아들 아명을 모세라고 짓기도 했다.

특히 그의 아버지는 독실한 개신교 장로로서, 목사로서, 불교와 무속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제주에 개신교를 널리 전파한 돈독한 크리스찬이며 지역 유지이기도 했다. 그는 일본에서 나온 성경해설서 등을 번역하여 출판할 정도로 개신교 전도에 열을 올렸고 또한 기독교계의 지식인이었다.


그렇다. 성인이 이 세상에 오실 때는 진자리, 마른자리 가리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보살이 목사의 아들로 올 수 있으며, 천주교 성인들이 불교 집안을 찾아올 수 있으리라. 칭기즈칸이 중국에 태어나고, 이순신이 일본에 태어난다고 이상할 일도 아니다.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와 삼계(三界)의 대도사(大導師)들이 왜 인간의 작은 틀에 갇히며 그런 사소한 것에 휘둘리겠는가.

생각해보자. 붓다가 왕자로 태어난 사실도 마찬가지다. 부와 권력, 욕망을 이룰 수 있는 자리에서 어떻게 우주를 꿰뚫는 대진리(大眞理)를 탐구할 수 있겠는가. 대개의 사람들이 돈에 휘둘려 인생을 허비하는 것처럼 부와 권력을 탐닉하다가 한 세상 보내기 딱 좋은 자리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붓다는 과감히 그런 욕망을 떨쳐냈다. 이는 가난한 사람이 가난을 떨쳐내고, 불우한 사람이 불행한 그림자를 지워버리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다. 그러고 보면 붓다는 붓다로서 가장 낮은 자리로 이 세상에 오셨던 것이다. 그러니 유마 김일수가 세상에 온 것도 그와 다르지 않고, 또한 우리들 각자의 탄생 인연도 다만 그러하지 않는가.


이렇듯이 유마 같은 성인이 이 세상에 올 때야 왜 편안한 거처에 몸을 두고 일신의 안위를 구하려 했으랴. 어쩌면 그는 한 세상 재미있게,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천성이 예감(叡感)하고 호방해 노래를 즐겨 불렀으며, 다루지 못할 악기가 없이 기타든 피아노든 잡기만 하면 천상(天上)의 음률을 빚어낼 수 있었다. 바둑이든 장기든 포커든 그 무엇이든 잡기라면 못하는 게 없었고 주흥(酒興)도 사뭇 도도했으니 풍류남아였다고 할 것이다. 인터넷 토론방에서는 결코 물러섬이 없었고, 언어감각이 뛰어나 영어, 일본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심지어 독일어까지 5개 외국어에 통했으니 이런 재능을 밑천으로 무역업을 열어갔다. 세련된 매너와 준수한 외모, 학구적인 지성미를 풍겨 뭇 여인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을 다 버렸다. 부처님이 왕궁을 버리고, 부귀를 버리고, 왕자라는 지위도 버리고, 처자권속도 버렸듯이 하나하나 차례차례 버렸다. 마음에서 버리고 현실에서 버렸다. 그리고 그는 오직 하나 진리만을 받아들여 벗하고 더불어 노닐었다.


2. 페니실린 쇼크


유마 김일수는 세속에 너무 오래 있기 싫어서였는지, 법을 깨우치는데 너무 목이 말랐던지 자신을 편안함과 안락함에 두지 않고 고난, 위험, 가난 같은 시련 속으로 몰아가려 한 듯하다.

그가 감기를 앓던 다섯 살 무렵, 시골병원을 운영하던 외가댁에서 어깨너머로 간단한 의술을 익힌 어머니가 만병통치라는 페니실린 주사를 놓으면서 그의 인생은 갑작스런 변화를 맞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일수는 외아들이요, 부잣집 자식으로서 누릴 수 있는 한 모든 걸 누리며 안락하게 자라고 있었다. 겨우 다섯 살이긴 했지만.

어머니는 아들이 아파하는 걸 참지 못하고 오직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주사기를 잡았다. 하지만 이 어머니는 아들 김일수에게 페니실린 부작용이 있다는 사실을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페니실린은 반드시 부작용 테스트를 한 뒤에 주사를 놓아야 하는데 자식 사랑이 급한 나머지 깜빡했으리라.

주사를 놓자마자 이 어린 아들은 실신했고, 호흡곤란, 두드러기, 경련 등 쇼크가 연속 일어났다. 이미 주사를 놓은 상태에서는 달리 손을 쓸 길이 없었다. 허둥지둥 하는 사이 어린 유마는 차츰 죽어갔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발을 동동 구르며 목을 놓아 주 예수그리스도를 부르는 동안에도 어린 유마는 깨어나지 못했다.

하루 동안 의식을 아주 놓았던 그는 가까스로 쇼크사를 면하고 눈을 떴다. 하나님의 은총이었는지는 모른다. 그는 죽음이라는 늪에 몸을 담갔다가 만신창이가 되어 겨우 빠져나왔다. 수자타가 목격했다는 청년 고타마 싯다르타의 모습을 닮았으리라. 6년 고행으로 깡마른 고타마 싯다르타의 겉모습을 유마 김일수는 단지 페니실린 주사 한 방으로 닮아버린 것이다.

그는 비록 죽지는 않았지만 이후 회복이 잘 안되는 심한 부작용에 시달렸다. 애지중지 아들을 길러온 그의 아버지는 화를 누를 길이 없어 이 연약한 아들을 데리고 과수원에 나와 따로 살았다. 그러면서 갖은 약과 정성으로 아들 김일수의 페니실린 부작용을 치료했다.

저 양치기 소녀 수자타가 갈빗대 튀어나온 깡마른 청년 싯다르타가 혹 굶어죽기라도 할까봐 우유죽을 갖다 먹였듯이, 그의 아버지 역시 젖을 짜 먹이는 심정으로 아들을 위해 밥을 짓고 약을 달여 먹였다. 훗날 김일수도 이 때의 일을 기억하고는 아버지의 정성이 수자타의 정성과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유마와 수자타의 대화>라는 제목을 만들었을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 유마 김일수는 처음으로 하나님 밖의 딴 세계를 구경했다. 그의 아버지 또한 하나님이 정한 인생 밖의 다른 인생을 맛보았다. 김일수도 아버지도 교회와 하나님, 예수님을 잠시 떠나 둘만의 시간, 둘만의 공간을 가질 수 있었다. 김일수는 이때 우주 속에 존재하는 자신, 우주의 품에 안겨 있는 자신을 보았던 것같다.

왜냐하면 훗날 어머니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라는 간절한 요구에 김일수는 주로 우주의 원리, 우주 속의 인간을 예로 들면서 자신은 오직 진리에 귀의할 뿐이라는 대답을 했기 때문이다. 물론 훗날의 일이고, 이때만 해도 그에게는 오직 하나님과 예수만이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페니실린 쇼크 이후 그를 아는 사람들 중에서는 그가 어려서부터 천식환자였으며, 그래서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았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이 일로 그에게는 두 가지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귀를 열어주는 아버지가 생겼고, 평생 아들이 잘 되기를, 교회 열심히 나가 구원받기를 호소하는 기도생활로 평생을 바친 어머니가 생긴 것이다. 특히 어머니는 아들에게 주사를 잘못 놓아 건강을 망치게 했다는 자괴감으로 평생을 몸부림쳐야만 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평생 아들을 위해 한 것은 오로지 하나님과 예수님에게 아들이 치료되기를 호소하는 것 외에 다른 아무 것도 없었다. 밤이고 낮이고 기도에 매달릴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정작 이 아들을 치료할 약이며 음식은 아버지가 구했다.


3. 하나님을 불교에서 찾다


그가 정확히 언제부터 백혈병을 앓았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그의 부모도 모르고, 그의 아내도 모른다. 절친한 친구인 수보스님이나 이달춘도 모른다. 다만 그가 페니실린 쇼크로 생사를 넘나들고, 천식으로 고생하고, 백혈병을 끌어안고 살았다는 점에서 그는 어려서부터 사생관이 독특했던 듯하다. 교회에 나가서도 종종 죽음에 대해 목사들에게 질문하고, 생사의 긴박한 문제에 정면 도전한 적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그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여 집안이 복잡해지면서 유마는 집에서 나왔다. 그때 고등학교 동창이던 광명사 수보스님에게 잠시 의탁하여 지냈다. 귀신 소굴이라고 여긴 절이긴 하지만 두 사람의 우정이 더 깊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때만 해도 그는 불교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고, 여전히 개신교 신앙만을 철저히 끌어안고 있었다. 그런 데도 불구하고 그는 죽마고우 수보스님하고는 더없이 절친한 사이였다. 수보스님 또한 승려 신분에도 불구하고 철저한 기독교인인 김일수의 부모를 마치 자신의 부모처럼 열심히 받들어 두 사람 사이에 종교가 다르다는 사실이 큰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

그는 수보스님을 학교 다닐 때 부르던 그 이름 그대로 방진주로 부르며 광명사 요사채에 머물렀다. 그저 친구네 집에 간 것뿐이고, 친구를 만나러 갔을 뿐이었다. 그래도 친구인 수보스님이 아침예불, 저녁예불 등 수행자로 성실히 생활하는 것을 보고 이것저것 묻기도 하면서 차츰 불교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유마는 천성적으로 호기심이 많았다. 불교에 대해 경계심을 풀고, 그러면서 호기심을 갖다보니 수보스님을 친구로만 대하지 않고 스님이라는 인식을 점차 갖게 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인 수보스님에게 볼만한 불교 책이 없느냐고 물었다. 어쩌면 ‘하나님이 아닌 잡신을 믿는 종교, 우상 숭배하는 미신이라고 치부하던 불교의 소굴’인 절에 머물면서 도대체 불교가 뭐 길래 저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무릎꿇어 빌까 궁금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 진주야, 따분한데 너희 불교 책이나 어디 한 번 읽어보자.

수보스님은 “기왕이면 이 책 한번 읽어보렴?”하고 ‘대승기신론’이란 책을 건넸다. 유마 김일수는 이 책을 받아 읽더니 연속 세 번을 읽었다.

대승기신론은 처음 읽는 불교책으로는 무척 어렵다. 그렇지만 유마는 전생에 닦아온 선근(善根) 때문이었는지, 타고난 지적 호기심 때문이었는지 용어도 모르고 맥락도 모르는 책을 15일 걸려 세 번이나 읽어냈다. 사실 김일수는 내심으로 불교의 허점을 찾아내고 불합리한 논리를 들추기 위해 책을 읽어보기로 한 것인지도 모른다. 진정으로 불교를 배우기 위해 그런 것은 아니었을 수도 있었다. 평소 불교를 무당의 큰집쯤으로 여기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는 대승기신론을 읽어 가면서 크나큰 충격에 빠져들었다. 그동안 기독교에 대해서 품고 있던 의문이나 문제점에 대한 해결법이 그 책에 다 들어있기 때문이었다. 불교가 허망하고, 미신이라는 증거를 그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가 안고 있는 태생적인 문제점마저도 시원하게 풀어주고 있었다. 대승기신론은 유마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책을 다 읽은 김일수는 “더 볼만한 거 없나?”하고 수보스님에게 물었다.

- 진주야, 불교를 제대로 알 수 있는 책 더 있지? 또 줘 봐.

수보스님은 이번에는 ‘여래장 사상’ 계통의 책을 내놓았다. 그리고 다음에는  유식학을 내주었고, 이어서 반야 계통의 책과 화엄과 정토까지 죄다 소개했다. 

여래장을 읽고 다시 유식학을 받아 읽기 시작한 김일수는 미신이니 우상 숭배를 넘어 뭔가 심상치 않은 우주와 자신의 비밀이 불교 안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렇게 해서 유마의 불교 공부, 스승의 지도 없는 독학이 본격 시작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수보스님은 친구 김일수의 눈빛이 달라지는 걸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진리를 깨달은 이에게나 느낄 수 있는 법열 같은 것이었다.

유마 자신은 그 당시의 일을 이렇게 기록했다.


- 나는『대승기신론(이기영 번역․해석)』을 내리 세 번을 읽었다. 눈도 떼지 않고 읽었다. 거기서 받은 큰 충격은, 기신론이 가진 논리의 허구성을, 기독교적인 유일사상으로 무장한 내가 찾아내리라고 무진 애를 썼지만 끝끝내 나는 실패하고 말았다….

책을 탁―하고 덮는 순간, 나는 차마 말할 수 없는 처참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이때의 나의 혼란은 거의 위험 수준에 가까웠다. 나는 분명 악마의 유혹에 빠져든 것이라고 거듭거듭 자성하면서, 하나님을 예수님을 모질게 붙들고 찾았지만, 이미 그 얇은 책자 속의 반듯한 논리는 그런 하나님을 모조리 없애버리고 지워 버린 후였다.




이러한 그의 느낌은 차라리 종교를 갖지 않았다면 무덤덤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많은 불교 신도들이 대승기신론을 읽지 않고 있으며, 읽더라도 무슨 뜻인지 잘 알아듣지 못한다. 너무 일찍 불교신도가 된 이들은 부처님오신날에 등 하나 공양한 인연만으로도, 법당에 가 절 한 번 한 인연만으로도 불교를 아주 잘 알거나 부처님의 자비를 한몸에 받은 것으로 착각하고 산다. 심지어는 절의 스님들하고 조금 친숙하기만 해도 불교를 잘 안다고 믿으려 한다. 그러나 그런 게 아니다. 정작 불교신도들조차 유식학을 공부하는 이가 드물고, 대승기신론을 읽고 공부하는 이가 아주 드물다. 그런데 개신교인인 유마 김일수가 이 책을 읽고, 불교 신도들이라면 놓치기 쉬운 것들을 꿰뚫어보고 마침내 붓다를 본 것이다. 불교를 통해 진정한 하나님의 실체를 본 것이다.

그는 기독교라는 독특한 사유체계 속에서 거의 반평생을 산 인물이었다.

그가 고백하여 말하기를 “비로소 예수가 보였다. 교회가 보이고, 믿음이 보였다. 기독교 안에서는 교회 안에서는 오히려 보지 못하던, 아니 그토록 보고 싶어하던 것들이 불교를 통하니 너무 잘 보였다. 막힘이 없었다. 기독교의 성경이, 기독교의 교리가, 기독교의 믿음이 아무런 막힘없이 줄줄 설명되었고, 흐르는 강물처럼 걸림 없이 이해되었다”고 했다.


이때부터 김일수는 본격적으로 불교세계에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참선 염불 등 기본수행에 열중했다.

당연히 집안에서는 갈등이 시작되었다. 특히 개신교의 열렬한 신자인 어머니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대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다만 아버지는 아들을 이해했다. 그래서 아버지와 자주 토론을 가졌다. 그가 나중에 인터넷 카페 ‘유마와 수자타의 대화’에 적은 글 중 상당수가 아버지와 나눈 문답 내용이기도 하다. 그만큼 그의 아버지는 마음이 열려 있는 분이었고, 진리를 탐구하는 지성인이었다. 이 때문에 제주도 중문의 개신교 장로이자 목사였던 아버지와 개신교 열혈 청년이던 아들 유마 김일수가 길고도 길며 위험하고도 위험한 문답을 치열하게 나눈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불교신도가 아니었다. 역설적으로 그래서 불교를 더 정확하고 깊이 배울 수 있었다. 개신교인이 교회 안에서 구원을 찾으려 하는 것처럼 불교인도 그가 아는 불교 안에서만 깨달음을 구하려 하는 이가 있다. 그래서 유마 김일수도 교회 안에만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페니실린 쇼크로 죽음을 맛본 그는 더 실체적인 하나님, 느낄 수 있는 하나님을 원했다.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하나님, 그런 실체가 아닌 허상으로는 그를 감동시킬 수 없었다. 기독교 신앙은 본디 따지고 묻고 토론하는 종교가 아니다. 믿고 따르는 것이다. 하지만 늘 생사의 경계를 밟고 서있던 그는 무조건적인 신앙생활을 견뎌내지 못했다. 의문을 가졌다.

왜 하나님일까?

여기서부터 시작된 그의 의문은 그칠 새 없이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교회 안에는 답이 없었다. 하나님을 의심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 갇힌 하나님, 일부 목사들에 의해 잘못 규정된 하나님을 의심한 것이다. 그러다가 앞서 말한 대로 우연히 친구인 수보스님을 통해 불교 책인 대승기신론을 접한 이후 그는 활연자각(?)하여 불교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가 뛰어든 곳은 삼보(三寶)가 바르게 자리한 곳이지 갖은 미신을 일삼거나 그것을 잔뜩 움켜쥐고 있는 권력화되고 도식화되어 있는 기성의 불교가 아니다. 그래서 그는 의심하고 파고들었다. 일찍이 붓다가 그러하고, 모든 조사들이 그러했듯이 그는 날카로운 지혜의 칼로 탐진치(貪瞋癡)를 도려내고, 욕락을 끊어낸 뒤에 거기 찬란하게 빛나는 그의 진리, 그의 하나님을 보았다. 교회에는 하나님을 찾지 못하고, 도리어 상상도 못하던 절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럴수록 그는 점점 불교의 세계로 깊이 빠져 들어갔다.


그가 부처님을 온몸으로 맞아들인 시기를 주인공인 유마 김일수는 서른다섯 살 무렵이었다고 회고한다.

- 나는 서른다섯 즈음에 비로소 절엘 가면 남들처럼 절을 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개신교의 습관이 배어 있어서 절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처음 불상 앞에서 절을 했을 때의 그 망설임과 두근거림이 기억난다. 그때부터 나는 초상집에 가면 망자에게 무릎 꿇어서 큰절을 할 수도 있었다. 비로소 나도 큰절을 할 줄 아는 전통적인 한국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발심이 솟구친 그는 인터넷 사이트에 토론 공간을 열어 종교 토론을 하거나 글을 싣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체계를 잡으면서 <유마와 수자타>란 이름으로 사이트( )를 마련하고 본격적으로 불교이론을 탐구하고, 토론하고, 문답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유마는 물론 김일수 자신이고, 수자타는 그의 아버지일 수도 있고, 교리를 묻는 네티즌일 수도 있고, 혹은 끈질기게 질문을 해댄 ‘굽 낮은 빨간 구두’를 신은 한 여학생일 수도 있다. 이 모든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 이제는 책으로 정리되었다.


그는 평소에 반야심경을 반복해 읽기를 좋아했다. 염불을 중시해서 몇 시간이고 집중하는 경우가 잦았다. 집에서 가까운 청계사를 자주 찾아 기도를 했는데, 저녁마다 경전을 읽고 기도와 참선을 잊지 않았다. 보는 이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그의 용맹정진은 유명했다. 그가 한창 불교에 심취해 있던 1997년에 이런 기록이 있다.


- 적어도 다음 네 분은 이 사바세계에 노니신다.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비록 선지식이 없는 말법시대이지만 이러한 대성인을 무려 네 분씩이나 모시면서 깨달음을 얻어내지 못한다면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하물며 뒤로 물러섬인가!


친구들은 말한다. 그는 불교 옷을 입었지만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있었다고. 본인도 그렇게 말했다. 하나님을 찾아 헤맸는데 교회에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더니 불교에 들어와 보니 하나님이 뚜렷해지더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를 낳은 어머니는 지옥고 같은 고통을 맛보아야만 했다. 애지중지 교회에 데리고 다니던 아들이 하필 지옥에 갈 미신이나 믿고 있다니 애가 탔다. 어머니는 아들을 볼 때마다 호소하고, 교회에 가 아들을 위해 미친 듯이 기도했다. 귀신 잡귀를 믿는 불교를 어서 버리고 교회에 나가 하나님의 참다운 말씀으로 구원받게 해달라는 간절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때가 있고, 그래서 사랑에도 때가 있듯이 그는 아버지를 얻고 어머니를 잃는 괴로움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개신교 장로이자 목사인 아버지와 수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세상을 보는 눈을 뜨기 시작했고, 그래서 더 가까워졌다. 아버지를 위해서라면 예수님과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고, 찬송하며, 아멘을 외칠 수 있었다. 어머니에게는 한없는 연민을 갖기는 했지만, 잘해드려야 한다고 몸부림쳤지만 개신교와 불교라는 장벽을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1995년 7월 18일의 기록이다.

- 어저께 제주도 어머니께서 전화를 하셨다. 교회에 나가게 해달라고 매일같이 기도드린다며 원망스런 말씀이시다. 다음 주부터는 꼬박꼬박 다니겠다고 말씀드렸다. 세상 모든 중생의 모든 소리를 관(觀)하시는 분도 있는데, 자식된 몸으로서 제 어미의 간절한 음성 하나 관해 드리지 못하면서 위로 무엇을 구할 것인가? 비록 종(宗)과 교(敎)가 다르다 해도 그런 것은 자식된 도리를 다함에 장애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어머니를 위해 찬송가를 불러드리고, 성경을 읽어드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승에서는 모자의 정을 잇지 못한다. 김일수는 저승 사람이 되었다. 항상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은 늘 그의 곁에 있었다. 인도를 가든 미국을 가든 제주에 가든 서울에 있든 죽음이란 화두는 언제나 그의 그림자보다 더 질기게 따라붙었다.


그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동창이자 현재 제주 중문의 광명사 주지인 수보스님은 이렇게 말한다.

- 어느 날 일수가 그러는 거야. 진주야! 내 속명이 방진주라서 이 녀석은 둘이 있을 때는 수보스님이라고 부르질 않아. 왜, 하고 대답하니, 너 백혈병이란 병 아니? 이렇게 물어. 그래, 그거 연속극에 잘 나오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그거 걸리면 어떻게 될까, 이렇게 또 물어. 야 임마, 죽는 거지, 뭐 있어. 그랬지. 그러고 말았어. 내가 이놈하고 제일 친한 친군데, 이놈이 일찍부터 백혈병에 걸렸는데, 나한테까지 말하지 않은 거야. 나한테 말하면 내가 제 어머니한테 말할 게 틀림없으니까 말 안한 거야. 그러니까 일수 부인도 그놈이 어느 날 갑자기 급성백혈병에 걸려 보름만에 죽은 줄 아는 거야. 그토록 오랫동안 병을 안고 산 줄은 모르는 거야.

그는 아무도 모르게 비밀리에 큰 병을 앓았다. 죽기까지 자신을 괴롭힌 병마를 원망하지 않으며 스스로 참회하고 염불하고 공부하며 극복하고자 했을 뿐 어머니, 아내, 자식들이 알지 못하게 했다. 그러고는 2002년 12월 13일, 죽음을 약 8일 남겨둔 즈음에 마지막 발원문을 적었다. 발원문의 마지막 부분이다.


- 몸은 쓰러지나 마음은 아닐 것이며, 이 마음 잠시 몸 따라 혼란스러우나 끝끝내는 아니오리다.

아, 제행은 무상하다. 이 몸은 반드시 쓰러진다.

제법은 무아이다. 쓰러지는 것은 ‘나’가 아니다.

이것을 모르면 괴로움이다. 나는 이것을 알므로, 몸의 고통은 있을지언정 괴로움은 없으리.


목숨을 마친다 해도 마음은 마치지 않아.

이 목숨 내 것이라 바득바득 우기며 살아온 지난 날, 부처님 아니 만났으면 내 어찌 구제했으랴!

홀로 가는 이 길에 남은 이들 눈물 보니, 차마 발길 떨어지지 않네.

내 반드시 가지가지 신통으로 그대들 곁에 머물러 바람으로 불어 그대들 보리심을 들려줄 것이며, 아지랑이로 피어나며 환화같은 이치를 설해 줄 것이며, 달빛으로 새어나와 그대들 염불을 도우리라.


정진하라. 정진하라. 불자여 정진하라.

모진 병과 죽음이 코앞에서 숨을 헤아리며 기다릴지라도, 불자여 정진하라. 물러서지 않음은 불자의 징표이다.


4. 일수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도중에 부처를 믿다가 벌을 받았다


하지만 그에게도 정해진 시간, 수명이란 게 있었다.

2002년 10월 말쯤 감기가 든 듯한데 잘 낫지 않는다고 걱정했다. 열이 39도 가까이 올라갔다. 감기가 아니라고 했지만 진단 결과는 전혀 달랐다. 백혈병이었다. 그는 진작에 자신의 병을 알고 있었지만 짐짓 감기인 척하면서 주위를 달랬던 것이다.

병원에 입원한 그는 평소 그토록 뵙고 싶어하던 숭산스님을 하필 생사의 징검다리를 밟은 상태에서 가까스로 뵐 수 있었다. 원래 고향 친구인 수보스님이 화계사 숭산스님이 참 훌륭하니 꼭 뵈라는 얘기를 해서 혼자 화계사를 찾아가곤 했는데 그때마다 스님을 뵙지 못했던 것이다. 그 괴로움을 적은 글이 있다.


- 선지식 없는 외로움!

이 외로움으로 한밤중에 일어나 몸을 추스르며 소리없는 절규로 눈물 흘리네.

아아! 스승 없음이여. 스승 없음이여. 내 목숨을 앗아갈 스승 없음이여…!

그 옛날, 저 영축회상에서 인천(人天)을 위해 법화의 법을 설하시던 석가모니붓다께 나의 스승됨을 청원하여 보건만, 두터워라! 이 업장(業障), 꿈에도 나타나지 않으시는구나. 하염없이 흘리는 눈물, 다만 이 선지식없는 외로움에…

- 요즘 어떤 때에는 목각으로 동무를 하나 조각해서라도 같이 염불도 하고 좌선도 하고 싶은 생각이 부쩍 든다. 그러니 그것이 바로 불상인 것같기도 하다.


늘 선지식을 만나지 못한 걸 아쉬워하고 스승없이 혼자 공부해야하는 자신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던 그는 하필 목숨이 다하는 순간인 2002년 12월 15일, 즉 사망 6일 전에 겨우 그가 바라고 바라던 그 선지식을 만나게 된 것이다. 희유한 인연이다. 평소 좋은 스승 만나기를 바랐는데 야속하게도 이런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때의 기록을 그가 남겼다.


- 병원 응급실 베드에서 숭산스님을 만났다. 심장이 안 좋으신 모양이다. 병원바닥이지만 큰절을 올렸다. 그러나 도저히 기력이 없어 삼배를 할 수 없었다. 겨우 일 배를 한 뒤 내가 여쭈었다.

유마 : 스님,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 잘 모르지만 마음을 어떻게 요긴하게 써야 합니까?

스님께서 대답하셨다.

숭산 : 다 내려놓아. 방하착이야. 불생불멸의 이치가 거기에 있어.

유마 : 스님, 마음은 내려놓지만 몸은 잘 내려놔 지지가 않습니다.

숭산 : 그래? 마음은 잘 내려놓았다는 말이지? 그럼 말해 봐. 마음은 있어 없어?

유마 : ……?

숭산 : 바로 그것이야. 오직 모를 뿐이야.


그는 여기까지 쓰다가 “아, 현기증이 나서 더 이상 쓸 수가…”라는 말로 맺고 있다. 이것이 12월 15일이다. 대신 그 자리에 동석했던 조카더러 숭산 스님과 만난 이야기를 더 자세히 적어 카페 회원들에게 알리라고 부탁해서 그 조카가 뒷 이야기를 조금 더 적었다.


유마 : (뭔가 교조적인 질문을 하자) ……

숭산 : 너처럼 자꾸 대가리를 쓰려고 하는 것이 문제야. 오직 모를 뿐이야, 그것에만 집중해.

유마 : (잠시 침묵 후) 스님, 불생불멸하는 것이 몸을 말하는 것은 아닐 테지요?

숭산 : 그럼, 몸이 아니지, 그럼.

유마 : 마음이 정해지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면 소용이 될까요? 염불도 괜찮을까요?

숭산 : 염불도 괜찮지. ‘나무아미타불’이라고 하면 좋아.


숭산을 친견한 후 유마는 어린애처럼 들떠 이 조카에게 자랑했다.

- 병원 로비 벤치에 숭산 스님과 나란히 앉았거든. 스님도 심장수술을 받고 치료중인 모양이야. 손에 링거를 꽂고 계셨어. 그래서 그 손을 가만히 잡아드렸지. 그러니까 스님도 링거 없는 다른 손을 조용히 내 손위에 포개시는 거야.


그러고서 일주일 뒤인 12월 21일이 되었다. 백혈병은 두통이 엄청나다. 헤모글로빈이 없어 결국 산소 부족 현상에 시달려야 한다. 얼굴이 백짓장처럼 창백해진다. 마지막 날, 그는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하여 몸을 수건으로 말끔히 닦고 이를 닦고 뒷물을 했다. 그러고서 침대로 돌아온 지 30분만에 의식을 놓았고, 그 길로 그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저승으로 가고 말았다. 아니 열반에 들었다.


그가 병원에서 의식을 놓기 전 간절한 마음으로 어머니에게 드린 글이 있다. 그는 평생 어머니가 종교적인 신념 때문에 고민하고 걱정한다는 사실에 큰 부담을 지고 있었다. 딸을 내리 낳다가 가까스로 얻은 귀하디 귀한 아들이 개신교를 버리고 마귀의 소굴인 불교로 귀의했다니, 평생 교회에 인생을 바쳐온 그의 어머니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너무나 끔찍한 일이었다. 그래서 유마 김일수는 그런 어머니를 위해 생신 때면 일부러 찾아가 찬송가를 불러드리기도 했다. 어머니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찬송가를 부르고, 성경을 읽어줄 수도 있었다. 어머니가 개신교라는 틀에 갇혀 진실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마다 그는 억장이 무너지는 걸 느꼈다.


아래 글을 보면 그가 유마였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이 글은 숭산스님을 뵙고 나서 쓴 글인 듯하다. 제목이 ‘정신을 놓기 전에’다. 실제로 이 글을 쓴 다음 그는 숭산스님을 만난 인연을 적다가 끝내 다 적지 못했다.


- 정신을 놓기 전에 할 말을 해둬야겠다.

내가 이대로 가면 형제들은 물론 홀로 언제나 나를 지지해 주신 나의 어머니마저 반드시 다음과 같은 견해를 지을 것이다….

“보라, 일수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도중에 부처를 믿다가 벌을 받아 회개하지 않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어떤 것인가를 겪고 말았다.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더하는 존재는 없다. 부처란 다만 우상에 불과하여 믿으면 이렇게 벌을 받는 것이다.…

어머니, 그리고 형제들이시여.

제가 비록 부처님의 도를 사모하여 이 길을 왔으나 하나님의 법을 비방하여 도려낸 적이 없고 가로막은 적도 없습니다. 드문드문 하나님의 법 가운데 어지신 하나님의 법이 아님이 분명한 것에 대해서만 가로로 세로로 재어 온전히 드러나게 했을 뿐입니다.…

사람의 목숨은 길고 짧음이 스스로의 업보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저는 아마도 지난 생애와 또 확실히는 금생에 많은 살생의 업을 뜻과 말과 몸으로 지었기에 지금 스스로의 목숨으로 갚는 것일 뿐입니다. 내가 만일 부처를 믿어 화를 만나 이리 된 것이라면 어찌하여 교통사고나 절벽에서 떨어지거나 지붕이 무너져서 목숨을 잃지 않는 것입니까?……

어머니는 아셔야 합니다.

저에게는 단 하나의 여인입니다.

나에게 어머님은 성모이십니다.

그런데 어머님이 낳은 성자는 누구입니까? 어머님이 낳으신 성자는 바로 (주님에 대한) 어머님의 믿음이십니다. 그런 거룩한 성자를 낳으신 몸으로 다른 거룩한 분을 비방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어머니마저 이 아들의 죽음을 그렇게 여기신다면 저는 이 세상에서 누가 나를 진정으로 지지하고 끝까지 저의 편이 되어 준다고 생각해야 합니까? 아버님도 가시고 없는데…….

어머니, 부디 그러한 견해를 짓지 마소서. 다른 형제들에게도 부디 그런 견해를 짓지 말도록 권면해 주세요. 부탁입니다. 저는 아직 어머님의 아들이지 않습니까? 이 어린 아들이 떼를 쓰는데도 기어코 부처님을 비방하실 것입니까?……

어머니, 나의 어머니. 이 아들은 어머니만 믿고 갑니다.


그는 갔지만 책 네 권을 남겨주었다. 이 책은 기독교인이 불교로 개종한 신앙고백서가 아니다. 만일 경박한 불교인 누군가가 나서서 이 책을 근거로 기독교를 비방한다면 유마 김일수를 비방하는 것이요, 나아가 부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이 책은 기독교와 관련이 없다. 하물며 하나님과 예수님의 권능은 하나도 다치지 않게 했다.

그러므로 불교인이라고 해서 이 책을 읽고 우쭐해서도 안 된다. 그는 교회에서 보지 못한 하나님을 불교에서 찾았을 뿐이다. 그는 기독교를 버린 적이 없다. 기독교의 잘못된 점을 버렸을 뿐 하나님을 버린 적이 없다. 물론 그가 불교에 귀의한 이후의 기독교, 하나님, 예수님의 정의는 이전의 정의와 사뭇 다를 것이다.

유마 김일수는 종교적 귀순자가 아니라 치열한 수행자였다. 그 같은 열정을 불교인들이 얼마나 갖고 있으며, 그가 탐구했던 그 정신을, 그 용맹을 과연 우리들 자신에게서 찾을 수 있는지 깊이 반성해야 한다. 그가 말하기를 기독교를 비난한 적이 없고, 다만 기독교 안에서 틀린 걸 틀렸다고 말한 것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불교에서 틀린 것도 과감히 그가 지적했다. 아무 이유 없이 절이나 해대고 기복을 구하는 것에 대해 그는 따끔하게 지적했다.

- 친구가 말하기를, (어느 절에서) 네팔에서 국보로 모셔져 있던 불상을 모셔왔는데 천일기도 정진 중 부처님 옆구리에서 꽃이 4송이 피어서 전국적으로 큰 화제가 되었다고 했다. 내가 말했다.

산사를 향하는 그 순간에도 죽음의 마왕은 어김없이 내 코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데, 너는 어찌하겠느냐? 너무 그렇게 신통한 곳만을 찾아다니며 좋아하다가는 신통이 곧 부처님인 줄 잘못 알지 않을까 걱정이다.

부처님 말씀에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부처님을 다 찾아다니며 공양한다 해도 가만히 앉아 짧은 순간이나마 마음을 밝히는 것보다 못하다고 했으니, 이 몸이 곧 법당이요, 이 마음은 부처님이고, 계율 지킴은 스님이며, 믿음은 청정한 신도이니 부디 너무 멀리서 찾지 마라.

불교에서도 도려내고 닦고 개선해야 할 점이 너무 많다는 걸 그는 잘 알고 그때그때 말했다. 그러니 누구도 우쭐하지 말고 정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유마 김일수가 이 세상에 다녀간 의미다. 우리 불교가 녹슬지 않았다면 어찌 부처님과 보살들이 유마 김일수를 이 시대로 보냈겠는가. 녹은 녹이요, 때는 때일 뿐이다. 그래서 그가 유언으로 말하기를 “불자여, 정진하고 또 정진하라!”고 했다.

그가 남긴 책을 거울삼아 가던 길을 더 똑바로 가도록 해야 한다. 붓다가 곧 깨달으신 분이니 그 분의 제자인 내가 가는 길은 항상 바르다는 견해도 짓지 말아야 한다. 그의 책은 진리가 아니다. 그가 늘 말했듯이 진리를 가리키는 그의 손가락일 뿐이다. 붓다가 열반에 들기 앞서 제자들에게 ‘내게 의지하지 말고 법(法)에 의지하라’고 말했듯이 유마 김일수 역시 두 아들에게 이런 글을 남겼다.


- 내 아들 승해야, 승인아! 너희는 내 아들이 아니라 법(法)의 아들이니, 마땅히 도(道)를 구할지언정 나의 육신된 상속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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