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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행복한『부처님 공부』

보리심 0 6,459 2008.03.28 00:00
『부처님 공부』

부처님 공부는 출가한 스님들이나 할 수 있지
재가불자가 하기란 어렵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 공부를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별로 못 배우고 업장이 많아서 인간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도 역시 과거 전생에 무던히 오계(五戒) 정도는 지켰기 때문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난 우리는
본성품에서 본다면 석가모니와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또는 내 앞에 있는 독사같이 징그러운 것도
역시 본성품은 석가모니와 비교하여 터럭 끝만큼의 차이도 없습니다.
모습만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남을 죽인 강도 역시 본성품은 석가모니와 똑 같습니다.

성경에, 베드로가 예수한테 가서
“상대편이 잘못할 경우 일곱 번 쯤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때 예수 말씀이 “일곱 번씩 일흔 번도 더 용서해라.”라고 합니다.

반야를 모르는 사람들은 남을 용서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한 번 미운 사람은 밉다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번뇌가 멸해서 실상을 바로 보게 되면,
모두가 비할 바 없이 청정한 부처님의 광명으로 빛납니다.
그런데 우리 무명의 눈으로는 바로 못 보기 때문에
미운 사람이 있고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따라서 죄는 밉게 보는 ‘나’에게 있습니다.

왜 남을 용서 못합니까?
우리가 늘 하는 말이 동체대비(同體大悲) 아닙니까?
동체대비란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만 가지 모습으로 다르게 보일지라도 본질에서는,
본성품에서는 모두가 다 한 몸인 부처란 뜻입니다.
모두가 다 부처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대비(大悲), 큰 자비라고 합니다.
그냥 약삭빠른 인정이 아닙니다.

팔정도의 정견은 우주의 두두물물(頭頭物物)을 자타시비(自他是非) 없이
일여평등한 진여불성으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 진여불성 아닌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 정견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정사유입니다.
이런 견해로 남이 듣기 싫은 말을 하겠습니까?
“누구한테나 베풀라.”, “말을 바르게 해라.”, “남을 용서해라.”는 등의
말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견만 굳건히 갖는다면 그렇게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행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 만약 그대가 자기 마음의 본체를 깨닫는다면
만 가지 덕이 다 갖추어 온다.’고 하여
“약명요심(若明了心) 만행구비(萬行具備)”라 하는 것입니다.
마치 고기 잡는 그물의 코가 천 코 만 코 있다고 하더라도
양쪽 걸이를 쭉 잡아당기면 모든 코가 따라 오듯이,
‘우주는 모두가 다 청정무비한 마음뿐이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을 가지고 화두를 들거나 염불을 하고, 또는 주문을 해야
참다운 염불이고, 참다운 화두입니다.
간혹 화두를 의심하는 것만이 참선이고
화두를 의심하지 않으면 참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석가모니나 달마스님께서는 그런 말씀을 한 적이 없습니다.
화두를 들지 않으면 참선이 아니라는 소리는
중국 북송 때에 임제 일파에서 한 것이고,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조 오백년 동안 중국에서 청신(淸新)한 불교 기풍이
못 들어 올 때에 나온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화두를 의심하면 참선이고,
화두를 의심하지 않으면 참선이 아니라는 것은 전도몽상입니다.
그야말로 법집(法執)인 것입니다.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고 했습니다.
부처님 법문은 주문으로 가는 문이나, 염불로 가는 문이나,
경(經)을 보는 문이나 다 문입니다.
심지어 복숭아꽃을 보고도 깨닫고,
길을 가다가 맑은 물을 보고 깨닫기도 합니다.
그런데 염불이나 경론(經論)이 참선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우리 마음이 상대 유한적인 상에 걸리지 않고,
앞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정견을 갖는다면
어떠한 공부나 다 참선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부르나 알라신을 부르나 다 참선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종교는 앞으로 틀림없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진리가 하나인데 종교가 하나가 안 될 수 있습니까?
기독교의 성경이나, 알라신의 코란이나
여러분들의 허심탄회한 마음으로 보시면,
다시 말씀드리면 불교의 반야바라밀로 조명하면 모두가 다 진리입니다.

마음을 활짝 열 때입니다.
재가불자나 출가불자나 모두 마음을 열 때입니다.
마음을 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마음을 연다는 것은 상(相)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상에 걸리지 않는다는 말은 아상(我相), 인상(人相), 수자상(壽者相),
중생상(衆生相)이 없음을 말합니다.
아상이라는 것은 ‘나’라고 하는 생각을 말하는 것이요,
인상이란 ‘너’라고 하는 생각을 말합니다.
수자상이란 시간이 짧고 길고 하는 분별을 말하고,
중생상이란 나는 사람이고 저것은 풀이며,
이것은 자연이라고 구별하는 것을 말합니다.

상(相)을 떠나면 자연히 공해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물 한 방울도 오염시킬 수가 없습니다.
땅도 살아 있고, 돌멩이 하나도 모두가 다 살아 있습니다.
법계 모두가 다 부처님의 광명으로 충만해 있는 것입니다.
중중무진으로 오직 부처님 생명뿐인 것입니다.

요즈음 한마음 운동, 한몸 운동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카톨릭에서 한마음 운동을 합니다만
정말로 우리가 한몸 운동 한마음 운동을 해야 합니다.
보통은 기껏해야 사람과 사람끼리만을 한 몸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천지 우주가 곧 한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참선 공부는 참 쉬운 것입니다.
천지 우주의 도리에 따라서 하므로 쉽습니다.
우주는 부처님의 본원인 우주 자체의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 중생들이 모두가 다 부처가 되게끔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중생이 다 부처가 되게 하소서!”
“모든 중생이 무량법문을 다 알게 하소서!”등의 사홍서원을 외지 않습니까?
그러한 것이 우주의 본뜻입니다.
우주의 목적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부처님의 본원이라 합니다.
우주는 바로 부처님입니다.
부처님 본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싫든 좋든 간에 불교를 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현대과학을 안 믿을 수가 없듯이,
불교는 진리이기 때문에 싫든 좋든 간에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미련한 사람들은 불교를 더디 믿을 것이고,
더러는 금생에 못 믿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총명한 사람들은 금생에 믿고 닦아서 성불하실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우주의 도리에 따른 것입니다.
아주 과학적이고 아주 철학적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대로 따르면 굉장히 쉬운 것입니다.
가령 부처님 말씀을 따라 음식을 적게 먹으면 더 없이 좋습니다.
낭비나 과소비를 하지 않고 절약하면,
그 또한 그렇게 좋단 말입니다.
자기도 가볍고 생활도 좋고 남도 숭상하게 됩니다.
고기도 먹는 것보다도 안 먹는 것이 훨씬 더 좋습니다.
고기 안 먹는 사람이 고기 먹어 보십시오.
얼마나 느끼한가 말입니다.
그런 것 많이 먹고서 군살이 붙어 보았자 그것은 우리 생명에
아무런 보탬이 안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 모두가 다 우주의 도리에 따르는 것입니다.
개나 소나 돼지나 우리가 먹는 고기도 역시 우리와 생명이 같단 말입니다.
우리가 먹음으로 해서 더 많이 죽여야 하겠지요.
많이 먹으니까 외국에서 수입을 해야 하겠지요.
내가 먹은 고기 한 점이 과거 어느 생에 내 부모님 살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개나 소나 돼지나 그런 것은 우리보다 더 업장이 무겁지 않습니까?
그런 짐승들은 과거세에 오계를 못 지켜서 사람이 되지 못했습니다.
업장이 무거운 그놈의 세포가 나한테 온다고 생각할 때,
내 몸의 세포가 오염이 안 되겠습니까?
오염되기 때문에 그런 것을 많이 먹어 놓으면
현대 문명병에 걸리기 마련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철저해야 하는 것입니다.
매서운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냥 대중화 시키는 것이 불법이라는 식으로 믿어서는
말법의 상식 차원, 속물 차원에서 못 벗어납니다.
그러면 남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파스칼도 말했듯이, 세계를 움직이려면 자기를 먼저 움직여야 합니다.
자기부터 부처님의 경전을 바로 세워 두고
바른 수행을 하여 증명을 해야 합니다.
증명만 해 버리면 그 이후는 말로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저절로 향기가 풍깁니다.
사향을 가지고 있다면 몸에다 구태여 향을 바르고
치장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저절로 향기가 풍겨 나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처님 법을 믿고 법대로 수행하는 것 보고,
향광장엄(香光莊嚴)이라 합니다.
부처님 이름 한 번 외고, 화두도 한 번 참구하면,
한 번 한 만큼 우리한테는 우리 생명의 향기가 그만큼 플러스가 됩니다.
치장하지 않더라도 그만큼 빛나는 것입니다.
부처님 후광을 보십시오.
본래 우리한테는 그런 광명이 있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잘못 살아서 그런 후광을 인멸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오직 외길로 천지우주의 진리인 부처님 길을 따라가는 그 길 외에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른 선택은 우리가 궤도를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한테는 불행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고(苦)의 인(因)을 지었기 때문에 고를 받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고의 인을 안 지었다면,
과거 전생에 탐심과 진심, 그리고 무명의 업을 짓지 않았다면,
인간으로 나올 필요가 없었습니다.
극락에서 영생을 구가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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