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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를 만난 한가위

동경림 0 6,584 2007.09.28 00:00
부처를 만난 한가위

예전 같지 않은 경기 탓 인지 추석 연휴를 한가롭게(?) 보내게 되었습니다.
매년 시댁에서 명절을 보내고 친정을 가면 오빠들과 남동생은 처가에 가느라고 모두 떠나 버리고 친정 엄마만 보고 오는 일이 많았습니다.
이번은 순서를 바꾸어 친정을 먼저 들려서 오래간만에 오빠와 조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수 있었습니다.
시간의 흐름은 아기를 어른으로 만드는 묘한 재주가 있습니다.
해마다 조카들은 쑥쑥 자라고 지난 시간을 이야기하며 예전의 철없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마냥 신나고 즐거운 이야기가 꼬리를 뭅니다.
늦은 밤까지 동전 몇 백원에 목숨을 걸고 깔깔 낄낄대며 고도리를 치면서 가재는 게 편이라고 판돈에서 용돈을 부지런히 챙기는 조카들.. 신나라 심부름하며 응원하는 모습을 보면서 엄마는 흐뭇해 하셨고 서로 알거지가 된다고 엄살을 부리며 갑부도 만들고 거지도 만들면서 긴밤을 밝힙니다.

오빠는 15년 전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포크레인 한 대를 사가지고 지금 사는 곳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타향살이가 그러하듯이 만만찮은 텃세에 무척이나 힘겹게 사람들과 부딪쳤던
지난 시간을 담담히 이야기하는 큰 오빠의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많은 시간의 흐름과 혼자 힘들었을 오빠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며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신부전증의 아픈 몸을 이끌고 요양 차 이곳에서 시작한 생활  오전에는 포크레인 작업을 하고 오후에는 4-5시간의 투석을 2-3일에 한번씩 받아야 하는 생활이였답니다.
모내기전 농토를 포크레인으로 고르게 펴는 일을 하였답니다.  오전에 일을 하고 양해를 얻어 오후에는 병원으로 다시 그 다음날 오전에 마무리를 하니 사용자 입장에서야 얼마나 불편하고 더딘 일 처리겠어요.  하지만 양해를 구하고 사정이 이러이러하다고 말한 후 그래도 좋다면 일을 해주겠다고 베짱 아닌 사정이야기를 하면 때로는 거절하고 때로는 그래도 좋다고 이해해주시는 분들이 있었답니다.  서툰 일로 신경질과 온갖 수모를 겪으면서 시간은 흘러 이제는 전문가가 다 되었답니다.  워낙에 성실하고 일욕심이 많은 성격이 남에 일도 제일 처럼 열심히 해 주고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열심히 일한 결과로 그 주변에서는 꽤나 알려진 실력자가 되었답니다.
진흙길을 가던 경운기가 빠져도 오빠의 일이고 눈이 오면 학교 운동장이나 마을길은 오빠의 손길을 기다리는 주 고객이라고 합니다.   
그때의 고마움을 가슴에 새겼답니다.
명절마다 식구가 많은 집은 식용유3개 셋트, 식구가 적은 집은 2개 셋트를 드리니 처음에는
부담스러워 하던 사람들이 그일을 10년째 계속하니 이제는 제사 상차림 준비에 식용유는 빼고 안 산다는 농담도 하신답니다.
제가 간 그날도 4발 달린 오토바이에 쌀 한가마니를 싣고 오신 할아버지께서 무엇이 고마우신지 고맙다는 말씀을 하시고 가셨습니다. 이유를 물으니 밭에 거름을 펴드렸다고 하네요
농사를 모르는 저는 알 지 못하나 할아버지께서는 꽤나 보탬이 되셨나 봅니다.


오빠가 신부전으로 고생할 때 엄마의 고통이야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었겠어요.
모든 것이 당신의 잘못인양 전전긍긍하며 자신의 장기라고 떼 주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고
다른 형제들도 조건이 맞지 않아 힘겨운 시간을 보낼 때 우연히 한 사찰의 스님과 면담 후
천도재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천도재를 지낸 후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26살의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뇌사상태인 청년의 장기의 수혜자가 된 것입니다.
의사선생님께서 수많은 환자 중에 가장 먼저 떠오른 환자가 오빠였답니다.
다행히 수술이 잘 되었고 지금까지 오빠는 본인의 철저한 관리로 정상인과 다름없는 건강체가 되었답니다.
다시 태어난 삶을 사는 오빠는 처음에는 원망과 욕심으로 형제들까지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과 이기심으로 가득 찼고 나 이외에는 없다는 생각으로 모두 필요 없다면서 남의 말 듣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주변을 힘들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장기를 기증한 사람의 성품까지 의심할 정도로 이해하기 어려운 시간이였습니다.

그러던 오빠가 언제 부터인가 자신의 인연을 맺게 해 준 사찰에 다니면서 보이지 않는 선행을 시작했답니다.
그 사찰은 경사가 급하고 길이 미끄러워 겨울이나 비가 조금 내린 날에는 걸을 수 조차 없는 진흙길에 자리하고 있어 절을 찾는 신도들이 여간 고생하는 일이 아닙니다.
눈이 오면 오빠는 포크레인을 가지고 가서 산꼭대기부터 산아래 까지 눈을 치우고 시간이 날 때 마다 자갈을 실어 나르며 길을 닦았다고 합니다.

요사이는 조경공사를 많이 한다고 합니다.
오빠가 꾸민 조경이 잡지에도 실리고 그 잡지를 보고 전국에서 연락이 온답니다.
돌 일을 하다가 적당한 돌이 발견되면 사비를 들여 마을의 이정표를 만들어 기증한다고 합니다. 시골에는 행정구역에 표시되지 않는 그지역 사람만이 통용되는 마을이름이 있습니다.
택배 아저씨들이 그 이정표를 보고 쉽게 찾아 온다고 합니다.
오빠가  사는 마을에도 “노루머리”라고 쓴 커다란 돌 기둥이 있습니다.
주소에는 “장두”라고 표기 되지만 마을사람들은 장머리 혹은 노루머리라고 해야 안답니다.

오빠의 사진첩에는 여러개의 돌기둥의 마을 이정표가 있습니다.
오빠는 받은바 은혜를 마음에도 새기고 돌에도 새겨 여러 사람에게 받은바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인것 같습니다.

오빠는 일을 계약할 때 상대의 입장을 생각한다고 합니다.
상대가 나에게 벌어주는 돈의 비율이 같아야 한다고 합니다.
내가 많이 버는 것은 상대가 많이 가지지 않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답니다.
저도 작은 일을 하지만 그런 마음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내것 먼저 생각하고 내 이익이 얼마일까를 먼저 생각하게 되고 손해볼라 치면 차라리 포기하는 일도 있습니다. 

오빠가 새로 시작하는 공사현장에 같이 가 보았습니다.
그곳 주인과 함께 협력하며 일 하는 모습을 보면서 누구의 집을 짓는지 구별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환하게 웃는 오빠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이 나이가 들면서 철이 들어야하고 그 철드는 모습에서 나보다는 남을 생각하는 마음을 내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를 느꼈으며 이번 추석에 한 분의 부처님을 만난 기분 좋은 명절이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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