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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운사벽화 이야기(7) -- 스승을 제도한 영원조사

장석효 0 6,764 2005.08.13 00:00
임진왜란 때 동래 범어사에 매학이란 스님이 계셨다.
이 스님은 원래 욕심이 많아 신도들의 재물을 탐내어 수도보다는 재물을 모으는데만 눈이 어두웠다.
어느 날 매학스님이 소산 앞을 지나다가 조그만 초가집에 서기가 돌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스님이 옷깃을 여미고 그 집에 들어서니 옥동자가 우렁찬 울음소리를 내며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토방 앞에 다다른 스님은 밖에서 기침을 하고는 산모를 향해 말했다.
'태어난 아기는 불가와 인연이 깊은 옥동자입니다.
그러니 잘 길러 주시면 십년 후 제가 와서 데려가겠습니다'
산모는 매학스님의 말에 순순히 승락했다.

그 후 10년이 지나 매학스님은 동자를 범어사로 데리고 와서 상좌로 삼았다.
어린 상좌는 아주 영특하여 잔심부름을 잘하고 부처님께 예불도 곧잘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매학스님은 동자에게 뒷산에 가서 나무를 해 오라고 시켰다.
그러나 저녁때가 다 되어 돌아온 상좌는 빈 지게로 돌아왔다.
'하루종일 어디서 놀다가 빈 지게를 지고 돌아오느냐?'
매학스님은 불호령을 내렸으나 어린 상좌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대답했다.
'스님, 그저 놀다가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제가 수풀을 헤치고 나뭇가지를 낫으로 베었더니
그 나뭇가지에서 시뻘건 피가 줄줄 흘러내리지 않겠어요.
그래서 도저히 무서워서 나무를 벨 수가 없었어요'
상좌의 말에 매학스님은 노발대발하여 호통을 쳤다.
'원 이런 고약한 놈을 봤나? 어디서 그런 얼토당토 않은 거짓말을 배웠느냐?
나뭇가지에서 피가 흐르다니! 나를 속이려거든 내 앞에서 당장 물러가거라.'
상좌는 하는 수 없이 그 길로 범어사를 떠나 금강산에 들어가 공부를 했다.

금강산 영원동에 가서 세간을 끊고 오직 한마음으로 정진한 상좌는 크게 깨달아 영원조사가 됐다.
스님은 흰구름 떠가는 푸른 하늘과 흐르는 시냇물에 마음을 두고 자적하게 지냈다.
스님이 30세가 되던 어느 날 선정에 들어 스스로 법열을 즐기고 있는데
홀연히 시왕동에서 범어사 옛 스승의 사후 죄를 묻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스님은 스승을 구하려고 신통력으로 명부에 이르러 그 원인을 알아봤다.
알고보니 스승은 생전에 탐심이 너무 지나쳐 죽어서 구렁이의 과보를 받았다는 것이었다.

영원스님은 곧 범어사로 향했다.
범어사에 도착해 보니 큰 구렁이가 고방에 도사리고 앉아 팥죽을 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영원스님은 여정은 풀지도 않고 즉시 고방으로 들어가 구렁이를 향해 정중하게 절을 했다.
그 구렁이는 이상하게도 팥죽을 잘 먹어 대중은 구렁이에게 늘 팥죽을 쑤어 주면서 극진히 대접했다.

구렁이가 팥죽을 다 먹길 기다린 영원스님은 얼마 동안 독경을 하더니,
'스님, 이게 웬일이십니까? 어서 해탈하여 승천하시옵소서' 라고 말하며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구렁이도 꿈틀거리며 영원스님을 따라 나가는 것이 아닌가.
구렁이와 함께 시냇가에 이른 영원스님은 구렁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러한 업신을 얻게 된 것은 전생에 탐심으로 재산을 모은 까닭이니
이제부터 모든 인연을 버리고 몸과 마음의 탐욕을 버리십시오'
말을 마치는 순간 영원스님은 옆에 놓인 큰 돌을 들어 구렁이를 내리쳤다.
바로 그 때, 숨져 가는 구렁이의 몸에서 새 한 마리가 나와 영원스님의 품에 안겼다.
스님은 다시 금강산으로 향했다.

길 가는 도중, 이 새는 암수의 짐승이 짝을 지어 노니는 것을 보면
그 곳으로 날아가려고 퍼득거려 스님은 이를 막느라 무척 애를 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날이 어두워 인가를 찾던 영원스님은 젊은 부부가 살고 있는 집에서
하룻밤 묵어 가게 되었다. 그날 밤 스님은 품안의 새를 주인에게 맡기며 당부의 말을 남겼다.
'지금부터 열달 후에 당신들 내외에게 옥동자가 생길 것이니 잘 길러주기 바랍니다.
그 아이는 불가와 인연이 깊으므로 10년 후 제가 다시 와서 데려가겠습니다'

그 후 10년이 지난 뒤 영원스님은 다시 이 집에 찾아와 동자를 절로 데려갔다.
동자승은 영원스님에게 열심히 공부하고 불도를 닦아 차츰 스님의 풍모를 갖추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영원스님은 동자승 앞에 무릎을 꿇고 큰절을 했다.
'스님,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아니, 스님 어찌된 일입니까? 어서 일어나십시오'
동자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했다.
'스님, 저는 본래 스님의 제자였습니다. 정신을 차려 저를 똑똑히 보십시오'
영원스님이 목메인 소리로 말할 때 동자승은 불현듯 전생을 보았다.

동자승은 자신의 전생을 거울 보듯 보고 구렁이인 자기를 죽였다는 그 원한의 숙업을 어쩌지 못해
어느 날 밤 그만 일을 저지르게 됐으니, 영원스님이 잠들기를 기다려 흉기를 들고 들어갔다.
영원스님이 기척이 없는 것으로 미뤄 깊은 잠에 들었을 것이라 믿은 동자승은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어 영원스님 곁으로 다가가 힘껏 내리쳤다.
그 순간, 벽장문이 확 열리더니 영원스님이 나오면서 말했다.
'스님, 이제 숙업은 다 소멸됐습니다'
동자승은 들었던 흉기를 힘없이 놓았다.

이 벽화의 이야기는 '윤회'를 말해주고 있다.
'윤회'는 불교의 교리를 지탱하는 주요개념임에 분명한데
누가 '윤회가 정말로 있느냐?'고 캐물으면 사실 대답하기 어려운 난제이다.
성철스님도 백일법문을 설하실 때 이 부분을 납득시키고자 많은 시간을 할애하셨다.
윤회는 그렇게 증명하기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지만 엄연한 사실은
그렇다고해서 윤회를 '부정'하기도 어렵다는 점이다.
그것은 왜인가?

의식을 담고있는 우리의 몸은 이미 물질계의 영역에서 끊임없이 윤회를 거듭하고있기 때문이다.
내가 마신 생수는 내몸을 구성하고 있다가 배설되어 다시 강물로 구름으로 비로 내리고..
쇠를 구성하고 있던 철분이 음식물을 통해 들어와 내 피를 이루고 있다가 또 자연으로 돌아가고..
내 몸속의 지방질이 배설되어 혹은 비누를 이루기도 하면서, 물질계의 순환은 끝없이 반복되고 있다.
'아래에서 그러하듯 위에서도 그러하리라' '물질계에서 그러하듯 정신계에서도 그러하리라'

사실 현대심리학에 있어서, 전생을 기억해 내는 게 뭐 그리 놀라운 사건이 못된지 오래이고
지금 달라이라마가 열네번이나 환생을 거듭해왔다고 하는 건 전세계가 다 안다.
그러나 윤회가 정말로 이루어지고있느냐의 문제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윤회에 대한 믿음이 우리를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윤회를 믿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윤회를 믿지않는 사람에게 죽음이란 모든 것을 앗아가는 두려운 존재이지만
윤회를 믿는 사람에게 죽음이란 그저 새로운 '명색(名정신 色몸)'을 받는 하나의 사건일 뿐이다.
헌차를 타다가 새차로 갈아타듯,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하듯 그렇게 여길 뿐이다.
졸업할 때가 됐으면 아쉽기야 하지만 잘 마무리하고 중학생이 될 희망을 품으면 되는 것이지
남들 다 하는 졸업 - 나 혼자 안하겠다고 생떼를 써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윤회를 믿지않는 사람은 자신의 존재가 '죽음'으로써 완전히 소멸돼 버리는 줄 알고 두려워하지만
윤회를 믿는 사람은 자신이 죽음조차 '초월'해 존재하는 '무한생명'임을 너무나 잘 알기때문에
'죽음'이라는 두려움과 고통(苦)에서 벗어나 '평온(安樂)'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윤회를 믿는 사람은 '행동'을 조심하게 된다.
윤회를 부정한다면 '죽으면 그만인데 되는대로 살다가 가지 뭐'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나의 행동(業) 하나하나가 내일 내년 내생(來生)의 '나'를 결정(報)한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어찌 함부로 행동할 수 있겠는가? 아니, 행동은 물론 생각(意業)조차 조심하고 경계하게 될 것이다.
생각 조심! 생각을 자주하다보면 자연히 말로 표현하게 된다.
말도 조심! 말을 자주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행동으로 옮겨지게 된다.
행동 조심! 행동이 반복되면 습관으로 굳어지고, 그게 바로 내 '운명'이요 '나'의 실체이다.
그와같이 생각과 행동을 살펴가며 살아가는 이는 마음이 청정해질 것이며
행동은 행동마다 공덕을 지어갈 것이니 만복이 저절로 생겨날 것이다.

윤회를 믿는 사람은 유정(有情) 무정(無情) 모든 존재를 함부로 대하지 않게 된다.
끊임없이 윤회(순환)를 반복하고있는 물질계의 일부로써 '몸'을 가지고 있음을 알기때문에
주변환경을 해치고 오염시키는 게 곧 내몸을 오염시키고 해치는 일임을 알고 조심하게 된다.
그리고 영겁의 세월동안 거듭된 윤회의 수레바퀴속에서 온갖 갖가지 인연을 맺고 지었을텐데
지금 아무리 낯설고 먼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인연의 그물속에서 나랑 동떨어진 이가 어디있겠는가?
그러하므로 모든 사람과 모든 생명체를 존중하고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나의 몸'은 '우주적 몸'으로 확장되고,
'나의 존재'는 '우주적 존재'로 회복된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윤회를 명쾌하게 입증하라면 곤란하다.
하지만 윤회를 믿는 사람과 그렇지않은 사람은 이렇게나 다르다.
이것이 바로 '윤회'의 가르침이다.

마하반야 바라밀 윤회의 지혜로써 우리를 죽음의 고통으로부터 구해주시는
삼계의 스승이며 자비로운 아버지이신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 이 '삼운사벽화이야기'는 [KBS코리아넷] 칼럼에도 소개되고 있습니다 <
> 칼럼을 보시려면: http://chuncheon.kbs.co.kr/reporter/col8/index.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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