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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운사벽화 이야기(6) -- 의상대사와 선묘

장석효 0 6,751 2005.08.08 00:00
1300여년전 당나라 현장법사가 천축을 다녀 온 이래 삼장법사란 칭호를 들으며 명성을 날릴무렵
의상과 원효는 유학길에 올랐다. 그러나 도중에 비를 피하려고 땅막에서 자게 되는데
여기서 원효는 '삼계가 허위이니 오직 마음뿐' 이라는 깨달음을 얻고 유학길을 접는다.

의상이 중국 땅을 밟은 곳은 산동반도 북쪽 등주 -
그 곳의 독실한 불교신도 집에서 몇일 머무르게 되었다.
이 집에는 선묘라는 아름다운 아가씨가 살고 있었는데, 그녀는 스님을 보살피다가 그만 반해버렸다.
그러나 의상은 여자를 멀리하고 오로지 공부에만 관심을 두었기에 선묘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의상이 적산에 있는 법화원으로 옮겨 머무는 동안에도 선묘는 멀리서 의상을 바라보면서 흠모하여,
절 밖에서 의상이 나오는 것을 기다려 마음을 전하려 했으나 의상은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의상스님을 향한 순정은 애절하였으나 결국 짝사랑에 그칠 수밖에 없었던 선묘의 심정이 오죽했으랴..

얼마 후 의상은 멀리 장안으로 떠나 화엄경을 설하는 지엄대사의 문하에 들어가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하여 방대한 화엄경의 대의를 불과 210자의 게송으로 읊은 '법성게'를 지을 정도로 수준이 높아졌다.
지엄으로부터 경률논 삼장을 배운 의상은 10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의상이 신라로 돌아가기 위해 등주 항구에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은 선묘는 바닷가로 달려갔다.

자기가 손수 지은 법복을 전해주고자 서둘렀건만, 이미 의상을 태운 배는 항구를 떠나고 있었다.
선묘는 의상에게 전해지길 빌면서 배를 향해 법복을 던졌고 법복은 무사히 의상의 품으로 떨어졌다.
멀어져가는 배를 안타까이 바라보면서 선묘는 의상에 대한 연정을 접고 오로지 무사귀국만을 기원했다.
그리고 죽어서라도 의상을 보호할 수 있도록 하늘에 용이 되게 해달라고 빌며 선묘는 바다에 몸을 던졌다.
이에 하늘이 감읍하여 선묘는 용이 되었고, 의상이 탄 배를 신라까지 무사히 보살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후에도 의상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선묘룡이 나타나 도와주곤 했는데
부석사도 선묘룡의 도움으로 지었다하며 부석사에는 선묘를 기리는 선묘당이 있고
무량수전 아래에는 길이가 10미터가 넘는 석룡이 묻혀있어 절의 수호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그 석룡은 아미타불 불상아래에 용머리가 묻혀있고 절 마당 석등 아래에 꼬리가 묻혀있다고 한다.

이러한 선묘의 애틋한 사연이 담긴 벽화를 볼 때마다 나는 원효가 생각난다.
여러가지 정황으로 볼 때, 원효는 아마도 '모범생 스타일'의 의상과는 성격이 매우 달랐던 것 같다.
원효는 결코 여색에 탐착하지 않으면서도, 요석공주와의 인연으로 설총을 낳았고
자재암설화에서는 비에 젖은 육감적인 여인의 유혹에 끝내 넘어가지 않으면서도,
여인의 무리한 부탁을 다 받아주어 관음보살의 인정을 받을 정도였다.
그렇게 무애하고 자재했던 원효가 의상같은 상황에 처했더라면 어떻게 했을까?
혹시나 좀 더 열린마음으로 선묘의 사랑을 불법(佛法)으로 이끌어 제도하고 깨우쳐주지 않았을까?
사랑을 이루지 못한 한 여인의 죽음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선묘의 이야기는
신라에 화엄종을 들여온 의상조사의 명성에 자칫 흠집을 낼만한 스캔들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선묘가 용으로 화(化)하면서 세속적인 비극이 종교적 신비로 승화되는 극적인 반전이 나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묘라는 한 여인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는 마음 한편을 아리게 하는데..
그래서 나는 이 벽화 앞에 설 때마다 원효를 생각한다.

원효라면 어떻게 했을까?



> 이 '삼운사벽화이야기'는 [KBS코리아넷] 칼럼에도 소개되고 있습니다 <
> 칼럼을 보시려면: http://chuncheon.kbs.co.kr/reporter/col8/index.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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